책리뷰

1942 대기근 : 살기위해서는 무슨짓이라도 해야했다

네그나 2014. 3.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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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대기근 : 삼백만명이 굶어죽은 허난 대기근을 추적한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는 일은 생소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도 보릿고개란 단어가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부황증(浮黃症: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이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이후부터입니다.


중국도 대기근을 겪었습니다. 허난성에서 일어난 대기근은 무려 삼백만명이 굶어죽게 만들었습니다. 허난성 대기근의 원인을 추척한 책이 <1942 대기근> 입니다. 당시 세계정세를 보면 1942년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유럽은 2차대전 중이었고 1942년 7월 17일에는 독일과 소련이 스탈린 그라드에서 전투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서 200만명이 사망할 예정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에서 전쟁, 아프리카에서 햇불 작전으로 미영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합니다. 조선은 일제강점기 치하였습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1942년 독일과 소련의 스탈린 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200만명이 사망하게 되면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된다. 참혹함을 보여주는 예로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 생존 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1937년 일본은 허난성 북부 지역을 급습해 점령했고 일본군은 계속해서 서진했습니다.1938년 진군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국민당의 장제스는 화위언카우 제방을 폭파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조치로 89만명이 사망하고 1250만명의 이재민( 중국의 단위란...)이 발생했습니다.정부가 수몰 예정 지역의 주민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음으로서 피해가 커졌습니다. 알리지 않은 이유는 정보가 새어나가 일본군이 계획을 알아채고 진로를 변경한다면 제방을 폭하는 일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국민당 정부는 제방을 폭파한 뒤 모든 책임을 일본군에게 떠넘겼습니다.


제방 폭파에 대해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화위언카우 제방을 폭파하지 않았더라면 일본군이 장저우, 뤼양을 점령했을 것이고 시안까지 위험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방 폭파가 잘못된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제방이 폭파해 황하가 범람하자 일본군은 신속히 남하하여 몇달만에 우한을 함락했으므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국민에게 대재앙만 안겼다는 것입니다.

중국 허난성허난성 위치. 1942년 이 곳에서 삼백만명이 굶어죽었다.




화위언카우 제방 폭파도 재앙이지만 이일은 앞으로 있을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타임지의 기자였던 시어도어 H
화이트는 황하의 물길이 바뀌면서 허난 지역의 생태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 발생한 대규모 가뭄에게 관련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허난성의 기근이 시작되다


1942년 봄부터 허난성에서 비소식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여름이 다 가도록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고 보리 수확량이 예년의 2~3할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나뭇잎과 풀처럼 평소에는 가축에게 먹이던 것들이 구하기 힘든 식량이 되었습니다. 마을 인근 길에는 껍질이 모두 벗겨져 속살을 드러낸 나무들이 서 있고 크든 작든 성한 나무는 없었습니다.

허난 대기근나무껍질을 벗기는 사람들




먹을만한 것이 없으니 사람들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땅에서 나는 것을 다 먹고 나자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과 땅 위를 기어다는 것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저도 다 먹고 난 뒤에는 기러기 똥마저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기러기는 곡식을 먹기 때문에 배 속에 아직 소화되지 않는 곡식의 종자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차마 기러기 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은 관음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배가 부풀어 올라서 죽어갔습니다.


식량이 부족하자 재래 시장은 호황이 이루었습니다. 먹을거리는 마련할 수 있다면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사려는 사람보다 팔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니 물건 값은 놀라운 정도로 저렴했습니다. 아사자는 속출했습니다.


업친데 덥친격.메뚜기 떼가 습격하다


기근이 심해지는 와중에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불청객이 등장했습니다. 메뚜기 떼의 등장입니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에는 옥수수, 조, 수수가 앙상하게 줄기만 남았습니다.  농민들은 빗자루를 휘두르며 메뚜기와 전쟁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절망한 사람들은 '메뚜기 신'에게 공양하며 하늘에게 빌었지만 하늘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메뚜끼 떼의 위력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국민당 정부의 토지행정부 장관을 역임한 리장자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과 소련의 모든 군사 장비를 다 모으더라도 허난 성의 메뚜기 재해를 소탕하지 못한다."


메뚜기 재해에 대해서 말하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곤충이잖아?' ( 베어 그릴스라면  이렇게 말할겁니다.  '곤충은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죠.' ' 메뚜기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고소한 맛이 나 맛도 괜찮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곤충을 미래의 식량으로 연구중인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식량냔 해결에 곤충이 가장 좋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굶어죽어가면서도 메뚜기를 먹지 않았을까?  마을 주민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메뚜기를 구워 먹기도 했지만 이를 본 노인들은 '재앙을 부르는 곤충을 먹으면 하늘의 노여움을 산다'고 꾸짖었습니다. 하늘이 노여움은 켜녕메뚜기를 먹은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미신을 믿은 사람들은 굶어죽었습니다.  당시 메뚜기를 먹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관음토를 먹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메뚜기를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사람의 가치. 아이는 시장으로 남자는 군대로 여자는 창녀로


재해지역에는 거리마다 가격표를 내걸고 자식을 파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이 때를 틈타 젊고 예쁜 여자를 싼값에 사들였다가 되파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의 값은 큰 폭으로 떨어져 어린이 한 명당 밀 한 근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고, 오빠가 여동생을 팔았습니다. 성안에 형성된 인간시장에서는 가족이 생사를 엇갈려 울부짓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군인이 되거나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장정은 군에 징집되었습니다. 굶어 죽는것보다 군대에 가는게 낫다고 생각되지만 군대의 상황도 열약헤서 탈영하거나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허난성 대기근




징집을 묘사한 과정을 보면 군인이라기 보다 죄수나 노예에 가깝게 대우했습니다. 군인을 징집할 때는 밧줄로 묶고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혹시라도 중간에 도망칠까봐 꽁꽁 묶었습니다. 보대장이 향사무소에 넘기고 향사무소는 관할 사단에 넘겼습니다. 넘기기만 하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감시가 삼엄했습니다. 어느 한 단계에서 징집한 장병이 도망치면 길에서 아무나 끌고 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사창가로 팔려가는 걸 끔직히도 싫어했지만 목숨을 연명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양극화 현상이 보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굶어죽거나 군대에 징집되거나 홍등가에 팔려나갔지만 인간 장사꾼들,중고위급 장교들, 국가적 재앙앞에 큰 돈을 번 사람들은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매춘부에 물쓰듯 쏟아 부었습니다.


마침내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등장하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다 먹어도 무수히 많은 아사자가 생겼습니다.  1942년 겨울이 되자 사람들은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렸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인육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일화가 있는데. 차오리시에 기거하던 어는 부부는 친딸을 먹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잡혀먹을 것이 두려워 어두운 밤을 틈타 도망가다가 길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사당에 살던 한 여자는 소년이 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집안으로 끌어들인 뒤 삶아 먹었습니다. 어떤 죄수는 남의 집 아이 허벅다리 한쪽을 먹은 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한 부부는 배가 몹씨 고픈 나머지 친딸을 죽여서 삶아 먹었습니다.


오후에 시체를 내다버리면 밤사이에 허벅지나 팔 한쪽이 없어지고 했고, 총살당한 범죄자의 시체는 형이 집행된 뒤 바로 수습하지 않으면 이튿날 토막 나 있기 십상이었습니다. 노점에서 맬데로 솥요리를 지고 다니는 장사꾼들이 파는 음식을 먹다가 손톱이 달린 고기를 발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손톱을 씹고서야 자신이 먹은 게 인육으로 만든 만두라는 걸 알았지만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허난성 대기근피난하는 사람들. 목숨을 담보하기 어려운 피난 과정이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와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인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는가?'  정부가 대재난이 일어났다면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할겁니다. 허난성에 재해가 일어났음에도 군용 식량 할당량을 면제해주지 않았고 가혹한 착취는 계속되었습니다. 지도자인 장제스는 허난성에 재해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지방 정부는 허위 보고를 올려서 표창을 받았고 사건의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인들을 탄압했습니다.

시어도어 H. 화이트허난성 대기근을 세상에 알려 사람들을 구한 타임지 기자 시어도어 H. 화이트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 기자였던 28세의 시어도어 H 화이트는 허난성 기근 소식을 듣고  취재에 나섰습니다. 허난성 기근에 대해서 몹시 놀라 진상을 알리는 원고를 미국으로 보냅니다. 타임지에 '수확을 기다리며' 기사는 미국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장세스는 국제적인 압력에 시달립니다. 1943년 3월 대재앙이 발새한지 1년이 지나 장제스는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실시하도록 명령합니다.

자연재해는 막을 수 없지만 인재는 막을 수 있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가뭄에 거기다가 메뚜기떼까지 덥쳤으므로 기근자체를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대기근이 닥친 초기에 가뭄에 대한 소식을 알리고 정부의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면, 지방정부가 덜 부패하고 무능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 쿠마르 센은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선 이후
발생한 기근이 자연재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권리의 불평등, 정보의 불투명성, 언론 자유의 부재, 민주적이지 않은 정치체제야 말로 빈곤과 기아를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근의 발생 여부는 사회가 어떤 권리와 제도를 갖추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1942 대기근


1942년 허난 대기근이 일어났지만 후에 더 큰 규모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오쩌둥은 서방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공업생산에 자원을 투입합니다.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착출한 결과 농업이 파탄나 버럽니다. 흉년이 겹치게 되자 1960년에는 2000만명의 아사자( 엄청난 규모)가 생기며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의 탐욕이 빗은 인재로 또 다시 기록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대기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기근이라 다름없는 상황이 일어 나는지도 모릅니다. 열악한 상황을 비관해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가족들이 뉴스에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요. 헤겔의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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