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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심리학 : 복수 유발자가 될 수 있다. 당신도.

네그나 2018. 4. 11. 13:40


복수의 심리학 ( Revenge / 스티븐 파인먼 )

우리는 왜 용서보다 복수에 열광하는가?


한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공해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이다"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감정을 건드리는구나. 다른이에게 능력, 돈, 환경적인 요인으로 무시를 당했다면 누구나 성공을 통한 복수를 꿈꾸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복수를 꿈꾸질도 모릅니다. 성공을 위해서든, 개인적인 감정을 씻어내리기 위해서든, 믿음을 배신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줄 생각이든 간에. 이 정도로만 한다면 긍정적인 복수이겠지요. 발전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잔인한 복수. 콜롬바인 고등학교 난사사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수심이 한 요인이었습니다.


실제로 복수를 위한 행동을 옮기지 않더라도 상상 복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책에서 예로 든 바와 같이. 나를 차 버린 애인이 끔직한 사고를 당하는 상상을 하던가. 비슷하게 상사의 차가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사고를 당하는 상상을 한다던가. 한 번즘은 해볼만한 상상입니다.


작년의 대히트곡인 윤종신의 <좋니>도 나를 두고 떠나간 옛애인이 조금 더 아팠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소심한 복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소심한 복수라면 일을 빨리 해달라고 닥달하는 이에게 일부러 늦게 끝마쳐 준적이 있습니다. 태업과 석여버린것이지만. 나름 작은 복수였습니다. 


"흔히 지옥에나 떨어져라" 라고 말합니다. 너무 흔해서 별 생각이 안들지만 뜯어 보면 무서운 말입니다. 지옥에 가라는 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 지속되는 고문을 받아라는 저주니까. 대부분 말의 저주로 끝내고 맙니다.


사람들의 상상력. 복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문학이나 영화, 예술이 최고이지 않을까요. 제가 꼽는 최고의 복수극은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테이큰 taken> 입니다. 영화는 복수할 수 있는, 복수심에 불탈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구사해 놓습니다. 친구와 여행을 간 딸이 인신매매조직에게 납치를 당했다. 여기서 이미 끝이 난 겁니다. 아버지는 전직 CIA 요원이었다. 살인과 고문 기술에도 능통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를 방해 하는 놈들은 다 죽어버린다. 상상만으로 짜릿합니다.



영화에서는 조직원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킬수를 올립니다. 친구 부인에게도 서슴없이 총을 쏘는 장면 딸을 되찿고 복수한다면 뭐든지 한다는 걸 보여주는 씬입니다. '나. 말리자마. 그러다 너 죽어' 테이큰은 대중이 가진 복수판타지를 아주 훌륭하게 충족시켜 줍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금합니다. 종교가 복수에 하는 훈계는 그렇습니다.


신의 복수는 순수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유대고, 기독교, 이슬름교, 불교, 힌두교는 대제척적으로 복수를 규탄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잘 알려진 구절. 누가 오른빰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주라는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말. 신학은 보복의 부질없음을 설파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그들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했고 복수를 후원하거나 묵인했습니다.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등. 나치 독일에서 구교 사제들과 신교 목사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히틀러를 축복했습니다. 최근 미국이 주도한 전쟁들은 복음주의 기독교 열정에 불을 당겼습니다.


다른 종교들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말로는 용서를 하라고 권했지만 자신들의 복수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슬람은 자신들의 종파를 위해서라면 다른 종파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응징을 했습니다. 불교 역시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불교가 반복에 반대하고 공생에 헌신하는 신앙입니다. 미얀마에서는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이 박해를 받고 있는데 선두에 서고 있는 사람들이 불교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의 정신적 리더인 승려 아신 위라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허황되게 느껴지는 말보다 이 말이 더 와닿을 사람이 많을 듯 합니다.


아무리 선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도 미친 개 옆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 법이다.



종교는 반복되는 복수는 불행을 몰고 올 뿐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신자와 지지자들에게 맞춰 정당화 시킵니다. 종교장에 나온 마지막 말이 정답이군요.  복수와 억제와 유화에 담론에서 종교는 언제나 은총인 동시에 저주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부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합니다. 복수의 국가의 전유물로 규정했습니다. 내가 당한 만큼 처벌을 받는 함부라비는 실제로 공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엄연히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상위 계급의 바빌로니아 인이 같은 계급의 시민의 눈을 멀게 했다면 마땅히 자신의 눈도 내놓아야 했지만 평민의 눈을 멀게 했다면 60세겔만 내면 그만이었습니다.


절도에 대한 벌도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상류층의 소,양, 나귀, 돼지, 염소를 훔치면 가축 가격의 서른배를 벌금으로 매기지만, 주인이 평민이면 그 열배만 변상하면 되었습니다. 벌금을 낼 돈이 없는 도둑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애초에 돈이 없어서 도둑질을 한것이니 그런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공정에 대한 개념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 지금 보면 불공평해 보이는 사례도 과거라면 당연하게 보일수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형벌. 권력을 통한 응징은 다시 봐도 야만적입니다. 용의자보고 벌겆게 달군 쇳덩이를 걸으라고 하지를 않나, 펄펄 끓는 가마솥에 팔을 넣지를 않나. 물에 던져 가라 앉으면 신이 받아 준거라고 해석하지를 않나.( 신이 받아주면 뭐하나. 그러면 죽자나...)


16세기에서는 이런 법도 있었습니다. '신체 건강한 남자가 사흘 이상 일자리 없이 지내를 것을 불법화 시켰습니다. 뭐야 이건. 부랑자들은 검거해서 피투성이 될 때까지 채찎으로 때린 다음 최단 경로를 택해 출생지로 쫓아 보냈다고 합니다.


사법제도가 개혁됨에 따라서 처벌이 교화와 갱생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사법정의라는 문명화의 얼굴 아래에는 항상 복수가 끓고 있습니다. 2016년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사범의 대한 초법적 즉결 처형을 허가했습니다. 사법정의와 복수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당신은 복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복수는 인간이 가진 강력한 욕구입니다. 아마 식욕, 성욕만큼이나 강할 겁니다. 슬픔, 분노, 굴욕과 촉발되는 폭발적이고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 이로 인해 누구나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걷고,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기도 하며, 긍정적으로 환원시키기도 합니다.


앞으롣 인간의 역사만큼 따라다닐 게 복수입니다. 복수 그 자체를 악으로 치부하기 하나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복수도 물론 있겠지만 복수 자체가 불평등을 바로잡고 정의를 세울 수 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얼마전까지 사회를 큰 태풍을 몰고 왔던 그리고 현재 진행형일 '미투' 역시 일종의 복수입니다. 미투를 잘 보면 말이 안되는게 많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지목하고 그에 대한 신상을 만방에 알립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쓰레기 같은 살인자들도 얼굴을 가리고 그 신상에 대한 정보를 알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행, 성폭행이 악랄하다고 해도 살인보다 더 중죄일 수 없습니다.



미투는 영화 테이큰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리암 니슨처럼 살인을 하지 않지만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거세시시켜 버립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부당한 권력행사로 이루어진 피해자의 처지에 분노했기 때문에 묵인을 해준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 부당한 권력 행사로 고발에는 찬성하지만 여성단체, 얼빠진 진보언론이 주장하는 죄를 사회로 환원하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도하는 운동에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복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과연 사람에게 복수심이 없다면 과연 지난해 촛불시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왔을까? 땅이 떨어진 질서와 정의에 분노하고 응징해야 하는 그 감정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복수심이란 감정이 없다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한 뇌과학자 말이 생각나는군요. 인간에게 감정이 없고 이성만 있다면 인간은 손익을 계산하느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거라고.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겠지요. 복수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복수의 심리학

복수에 대해 가장 무책임하다고 생각되는 말은 용서를 강조하는 분위기입니다. 피해자에게 최책감을 가지기를 종용합니다. "나는 그자가 한 짓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계속 용서해야 한다고 말해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주변에서도 작은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화해 시킨답시고 용서를 권하고 응하지 않으면 졸렬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는 어설프게 용서를 권하는 영화,소설에서 나오는 같잖은 조언들을 아주 싫어 합니다. 왜냐 현실성이 없거든요.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정말 그럴 수 있냐고? 묻고 싶습니다. 용서를 권하는 종교도 그러하지 않았고, 말만 앞세웠던 진보적인 사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말로만 용서를 해왔습니다.


한가지 기억나는 사례가 있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수부대 요원들이 반군(테러단체였나) 잡힌 수녀를 구출했습니다. 백인이고 여자였으니 그녀는 말 못할 능욕을 당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타오를 만도 하건만. 수녀의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 멍해진 부대원. 저도 그랬어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지만 성인급의 인물이 아닌 이상 우리같은 사람은 행동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앞으로 인류가 계속되는 한 복수의 길도 이어질겁니다. '어슬프게 용서가 낫다.' 행동으로 이루지 못할 말을 하기 보다. 이렇게 생각해 보는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일단 정당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뉴스에서 나오는 갑질에 혀를 차다가고 무심결에 하는 내 행동이 갑질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지금 한창 떠들썩한 다산 신도시 택배사건처럼요. 지금 이 사건으로 인해 복수의 감정에 활활 불타고 있는 사람이 있을껄요. 복수의 감정이 어떻게 뻗어나가고 어디에서 싹을 틔울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악의적으로 한 행동으로 인해 복수를 당할 수도 있겠지만 의도치 않았는데 복수의 감정을 지필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한 행동이나 말 한마디에도 그럴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속한 단체, 조직, 민족, 국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도 가능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연결된 우리는 어떤식으로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복수 유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슴에서 불을 지필. 언제, 어디서라도, 설사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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