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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 : 혁명은 포크문화여서 가능했는가?

네그나 2015. 12. 23. 23:30

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 후기 2편입니다.



선비의 나라와 상인의 나라


사농공상의 사민론이 지배했던 유교 문화권에서는 '공'과 '상'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벌레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공'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실로 숭고하 모습을 나타낸다. 가로로 그은 두 줄의 평행선은 하늘과 땅을, 그 사이에 세워져 있는  세로 선은 인간을 의미한다. 발을 대지에 향해 등뼈를 꼿꼿이 세운 자랑스러운 인간의 모습이 아닌 '공'의 세계이다.


하늘과 땅은 인간에 의해 이어져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그곳에서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장식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한 사람의 고독한 작업이 아니다. 하물며 프로메테우스의 도둑질과 반역에서 시작되는 그 '공'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p.89)


공이란 단어를 아주 좋게 표현했지만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공의 현실에서 인식은 현대에도 크게 변화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사법시험 존폐논란이 그렇습니다. 로스쿨이냐 사법시험냐를 떠나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그들의 생각입니다. 법질서와 서비스를 개선시키기 전, 모두가 계층상승, 신분상승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시험을 신분상승을 마지막 사다리라 생각하고 논쟁하는 반면 미국인은 어떻게 상인이 될까 고민합니다. 그들은 명문대를 뛰쳐나와서 창업을 시도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좋은 경험이라는 풍토를 만들었습니다. 선비가 되고자 하는 나라와 상인이 되고자 하는 나라의 차이입니다.






미국도 따져 보면 신분상승의 기회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현재 새롭게 부를 축적해서 랭킹에 든 사람들 대부분이 IT기업 출신이라는 점은 기존 산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창업으로 성공한 사람들 역시 넉넉하고 부유한 중산층 이상으로 요즘 유행하는 흙수저는 찾기 쉽지 않습니다.



빌게이츠를 비롯한 기업인들이 외국인 유학생을 더 받아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학이라는 분야가 미국인들이 가기 꺼려하는 길, 힘든 길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미국이 새로운 기회와 부를 창줄하는 것에는 틀림없습니다. 시험을 쳐서 기회를 만들기 보다 거래를 통해서 교환으로 말입니다.




이미지의 함정, 인간적인 경영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어령은 단어에서 시작해서 사물로 현대사회를 해석하는데 여기서 무리수가 보입니다. 서양의 헨리포드가 도입한 분업화 방식은 인간이 배제되었다. 인간의 기계에 철저하게 이용만 된다. 반면 일본은 공의 개념이 다르다. 도요타는 기계에 맞춰 저스트 인 타임으로 일하도록 운영했으며 인간과 기계가 함께 일하는 방식이다.



이어령이 이 글을 연재한 시대가 2004년도 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창 도요타 생산방식이 인기를 끌고 있을 시절입니다. 지금 현재. 애플을 배우자고 떠드는 것처럼 도요타를 배우자는 열풍이 일어났던 시기였습니다. 다른 것도 많았죠. GE를 배우자. 잭 웰치를 배우자. 배워서 조금 나아졌는지 궁금합니다.



이것부더 짚고 넘어가보죠. 도요타 방식이 인간적인가? 2007년도에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 <도요타의 어둠>. 도요타에서 과로사로 죽은 30세 사원을 예. 월 144시간의 잔업을 요구, 해외지사 현지 노조 탄압, 근무중 전신화상을 입은 사원을 무단 해고. 화려한 JIT에 가려진 추악한 모습입니다. 


강압적인 사내 분위기도 있는데, 다음 대사를 도요타를 벗어난 것을 독재국가인 북한에서 벗어난 탈북으로 표현했습니다.

“꼭 작은 북한 같아요.” 탈북(토요타자동차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람)한 전 사원이 그렇게 말한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처럼 격리된 입지, 독특한 공기, 세뇌적 교육, 엄격한 규율 등을 보고 있자면 거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작은 북한’이 아닐까 싶다.“


도요타가 자랑하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JIT 기법을 봅시다. 이것이 인간적일까? 옛날에 하청하는 기업입장에서는 납품하는 기업의 창고를 사용함으로써 다소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고비용을 한 없이 아래로 가져가겠다는 발상은 그 비용을 나 대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겠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책에서는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농민들은 감을 수확할 때 배고픈 상황에서 까치와 같은 새들을 위해서 한 두개 남겨놓는 관습을 지녔고, 더불어 이를 살아가는 삶의 여유라고 표현했습니다. 도요타의 JIT는 나무에 매달린 감 하나, 이삭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기법입니다. 쥐어 짜이는 대상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과 기계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인간적인 경영은 더더욱 아닙니다.



시니컬하게 보면 이것이 현대 경영의 특징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멋진 단어로 대체해 버립니다. 멋진 단어로 표현되는 것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신문과 뉴스에세 호의적인 표현으로 도배됨은 무언가 다른게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도요타가 연 1,000억엔이 넘는 광고선전비로 언론을 매수하고 화려한 말만 늘어놓게 만들었습니다.



2010년에 도요타의 가속페달 결합사건으로 도요타에게 위기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도요타가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글로벌 기업입니다. 허나 도요타에 대해서 칭찬 일색이었던 분위기는 순간 변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게 기업에게 인간적인 면을 기대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기업과 제품 이미지도 중요해서, 환경을 보호하도록 변하고 하청업체의 열악한 노동 환경도 개선되는 추세이지만

기업에게 이상적인 인간상을 투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윤을 얻기위한 목적으로 모인 집단에서는 엄연히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 공익을 위해서 사회를 생각하기 기업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업들은 성장하면서 가치관의 충돌에 부딪치게 됩니다.  글로벌 기업이 되고자 한다면 처음에 설정했던 가치와 더욱 충돌하게 될 일이 많을 겁니다.



특히나 위기시에 보여주는 모습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진실에 더 가까울 겁니다. 미래는 사람이고 희망이라고 외치던 모 기업의 행태를 보고 있으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들에게 사람은 무슨 의미였을까? 한 번 마시고 구겨 버리는 일회용 컵이라는 걸 숨기고 싶어서 이미지 광고에 돈을 썼을까?




이어령은 현대산업에서 보이는 문제를  동양의 정신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인간성의 회복은 좋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동양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지도 제시하지도 못했고 서양이 겪은 시행착오를 그대로 답습하는 중입니다. 저는 차라리 기술발전에 기대를 걸겠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의 완성이 된다면 적어도 가혹한 노동환경은 개선될테니까.



혁명은 포크 문화여서 가능했는가?


위의 프로메테우스의 도둑질과 반역에서 시작되는 세계 대목이 번득이게 했습니다. 이어령은 도둑질과 반역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서 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코드가 보이지 않나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입니다.



왜 불을 인간이 사용하면 안되는가? 는 혁명가들과 닮았습니다. 혁명가들의 면면을 살펴보세요. 대부분 중산층에다 배울만큼 배운 지식인입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수 있음에도 불평등한 세계에 대하서 고민을 했습니다.  우역곡절이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의 모색이 세계를 바꾼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가 항상 좋지만은 않았지만.





이 생각이 식문화로 연결되더군요.

한입에 들어가지 않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그대로 식탁에 올라오는 서양의 식문화에서는 먹는 다는 것은 찢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열심히 식사하는 서양인의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대문이다.



아시아인들이 젓가락을 사용해 여기저기 접시 위의 음식을 콕콕집어 식사를 하는 모습은 어쩐지 참새를 보는 것 같다. 또 젓가락을 들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살짝 고개를 기울이거나 천장을 바라보면 왠지 채식주의자 특유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젓가락은 음식을 재는 저울이자 척도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불편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먹는 사람이 입장이 되어 음식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철판구이 식당에서는 손님 맞은편에 있는 요리사가 구운 고기를 잘 드는 칼로 먹기 좋게 잘라준다. 손님은 포크와 나이프가 없어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숯불구이 전문점도 마찬가지이다. (중략) 예를 들어 갑자기 손님의 얼굴에 향해 가위를 내밀어도 놀랄필요가 없다. 젓가락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따뜻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중략) 서양 레스토라에서 이러한 일이 한 번이라도 벌어지면 친절은 커녕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기가 결정하고 원하는 만큼 먹으면 그만이다.


책에서 나오는 일관된 분위기입니다. 동양이 더 인간적이라는 주장. 젓가락 문화인 동양은 채식주의자처럼 온순하지만 고기를 찢어서 먹는 서양은 고양이가 쥐를 먹는 다소 폭력적인 모습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가위로 눈이나 팔을 찌를 수도 있고 잘못해서 머리카락을 자를 수도 있는데 놀라지 말라니 동의가 안됩니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가위를 봐도 놀라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포크와 나이프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가 동양보다 더 험악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식사테이블이 마치 죽고사는배틀필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이 먹을 것을 요구하고 결정하는 포크 문화였기 때문에 혁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혁명은 모두 서양에서 나왔습니다.


6월항쟁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가 촬영해서 6월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젓가락 문화에서 혁명은 가능한가?


동양에서도 혁명이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4.19혁명과 6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나라에 포크와 나이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고. 자신이 먹을 것을 결정 것.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혁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이 잘라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가 먹을 것은  스스로 자르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은 말한대로 2004년에 일본 잡지사에 연재한 글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단어에서 시작해서 문화로 해석하는 이어령의 방식은 흥미기는 하지만 헛점이 많이 보입니다. 서양은 비인간적이고 동양은 인간적으로 묘사해 놓은 점이 대표적입니다. 동양문화의 긍정적인면을 애써 강조하려다 보니 해석의 무리수가 많이 보입니다. 동양이 서양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이팟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묶은 아이팟이 더 잘맞는 예다.



도요타의 JIT를 인간적으로 설명한 것이라던가. 소니의 워크맨은 너무 과거 사례입니다. 하드웨와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완벽하게 묶은 아이팟을 지금으로 설명하기 가깝습니다. 테이프는 커녕 CD조차 사라진 지금 워크맨으로 설명하는 것은 롤(LOL)하는 아이들에게 스타크래프트로 비유하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더 잘맞는 예는 오픈소스 문화의 등장입니다. 이도 서양에서 등장했죠. 괴짜들의 취미활동 수준으로 오픈소스 운동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오픈소스에 적대적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조차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인문학자이니 경영이나 기술 등 세세한 부분 까지는 알기 어렵겠만...



10년전의 내용이니 지금과 다소 동떨어져 있져 있고 그의 주장과 동의가 되지 않는 점도 많았습니다. 다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면이 좋았습니다. 최근에는 책을 읽어도 멍할때가 많았는데 다른 의견을 내고 싶으니까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정답이 아닌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만으로 인문학을 표방한 이 책은 성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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