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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죽음을 그저 죽음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네그나 2020. 5. 6. 23:13

이천 화재 참사로 38명의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경찰의 조사로 밝혀지겠지만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 주목하는 건 사회가 바라보는 죽음의 무게입니다. 대통령이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고, 이낙연 전 총리도 이천을 방문했지만 사망인원 38명. 높은 숫자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적습니다. 남 말할 필요도 없이 저 또한 이천 참사를 세월호나 다른 참사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이천 참사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하지만. 정말 코로라 때문에 그럴까요? 저 38명의 숫자 앞에 단어를 추가해 봅시다. 그러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 어린이 38명 죽음

-> 청소년 38명 죽음

-> 여성 38명 죽음

-> 노인 38명 죽음

 

38 앞에 다른 단어가 붙여져 있다면 분명 사회적인 관심과 주목도는 달라졌을 겁니다. 물론 1순위는 어린이와 유아입니다. 그다음은 청소년, 다음으로 여성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비극을 보면서 감정은 다르겠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더 공감받기 쉬우리라 예상됩니다.

 

한 명의 살인으로 언론의 관심은 물론이고 장관, 경찰청장까지 모습을 보이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전 이 사건을 보고 블로그에 글을 남겼습니다. 그때 쓴 글을 꺼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지금과 같은 감정입니다. 그대로 복사해 넣어도 되겠습니다.

 


 

남성은 죽음은 관심받지 못한다. 아주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틀전.  그러니까 5월 19일입니다. 고속도로 보수 공사 작업을 하던 인부 4명이 수십 미터 아래로 추락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언론은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언론은 그저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처럼 취급하는 모양새입니다.

 

우리나라의 노동현장에 대해서 심도 있는 고찰을 하지도 않습니다.  유명 앵커가 시간을 할애해서 남성들은 일 상회된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혹시 클로징 때 이 사건을 언급했나요? 그렇다면 고치겠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은 만 성회 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그 많은 사람들 중 하나. 그저 단순히 엑셀에서 +4 처리되었습니다.

 

제가 일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똑같습니다. 공사현장에 잠시 있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사고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아주 좋게 봐줘야. 모지역의 모모 현장의 모씨 공사현장에서 사고로 숨져.로 단신 처리되겠지. 어디 이름도 듣지 못한 회사에 속한 볼품없는 노동자의 죽음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슬퍼하는 건 단지 나의 가족과 친구들일뿐. 어떻게 포장을 하든 개죽음일 뿐이야. 막상 현장에서는 이런저런 논리로 원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고 불운으로 이어질 때는 사고로 연결이 됩니다. 더 높은 효율을 위해서 ( 더 빠름 ) 불구덩이 속으로 던지는 겁니다. 

 

성차별 수사 논란으로 청와대와 대통령까지 한 마디 거들면서 대책 마련을 지시합니다. 혹시 청와대나 청지권이 고속도로 보수 공사 작업 사고에 대해서 성명을 발표했나요? 대책 마련은요? 네이버 뉴스를 검색을 해봐도 무미건조하게 사건을 설명할 뿐입니다. 지식인의 잘난 칼럼도 없고, 깨어있는 척하는 기자의 한 마디도 없습니다. 언론이 그저 하는 말이라고 곤 늘 말해왔던 예고된 인재. 그 따위 말을 할 거면 미리 예고라도 좀 하지 그랬어. 그러면 죽지도 않잖아.

 

 

얼마면 돼?

남성의 죽음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한 사회

 

4명이 죽어도 그뿐.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한편으로는 불편한 생각한 번 해볼까요? 어느 정도 죽음이 일어나야 관심이 일어나는가? 대참사인 세월호 침몰 사고는 299명이 사망함으로 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고, 애도를 표하게 만들었고 정치적 논란으로 번졌습니다. 제천 스포츠 센터에서는 화재에서는 29명이 사망했습니다.

 

똑같은 죽음인데. 애도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문턱 값은 얼마나 일까? 흥미로운 질문 아닌가요? 4명 가지고는 확실히 안됩니다. 정치권 성명도 없고, 명망 있는 앵커가 파고들지도 않으니까. 5명, 아니요. 6명, 7명. 안됩니다.

 

확실히 한자리 숫자는 안될 거 같습니다. 2자리 숫자 이상의 사망자가 나와야 할 겁니다. 2자리 숫자가 나와야 언론은 좌판을 펼치며 훈계하듯이 정치권과 사회의 각성을 촉구할 테고. 정치권은 하나마나한 대책 마련에 요란할 테고. 청와대도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겁니다.

 

2자리 숫자도 미심쩍합니다. 앞자리 숫자가 적어도 2는 되어야 할 거 같습니다. 워낙 사건 사고에 익숙해진 나라라. 그 정도로는 충격이 일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4명은 아닙니다.

 

정말 안타까웠던 4명이 기억납니다. 군대 간 아들을 면회를 가러 갔다가 고속도로의 사고로 일가족 모두가 사망했던 사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평등하지도 않지만 죽음조차도 불평등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남성은 죽음은 더더욱 무시됩니다. 왜냐하면 남성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죽었다는 인식도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겜돌이라 게임이 생각나는 장면이. 스타크래프트의 노동자 SCV입니다.

 

평소에는 소처럼 일하다 위기 상황일 때는 소모가 되어야 하는 존재. 스타를 하지 못할 때 프로들이 보여주는 그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어쩃든 유닛은 하나라도 강아지처럼 아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필요로 따라 폐기 처분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인식의 전환이었죠. 훌륭한 게임을 하려면 쓰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훌륭한 경영을 하려면 쓰고 벌릴 줄 알아야 한다. ( 현실판 예. 아마존 )

 

게임에서도 보여주지만 현실에서도 남성을 소모품으로 대하는 조직의 끝판왕이 군대입니다. 그러고 남성이 소모품화 되어가는 걸 사회는 동조하고, 암묵적으로 유도합니다. 남성조차도 그렇습니다.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까. 참 제가 너무 희망적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두 자리 사망자 숫자라면 그래도 사회적인 시선이 다소 다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예. 알고 있어요. 사람의 관심. 특히나 대중의 관심은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큰 희소자원이라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요. 사람들은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는 신경을 쓰지만 관심의 차이에는 무심합니다.

 

한국사회는 너무나도 정치적이고 과몰입한 사회라 어떤 현상을 보고 무수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대통령 탓, 여당 탓, 야당 탓, 신자유주의 탓, 가부장제 탓, 기득권 탓, 재벌 탓, 그들의 해석을 보고 있자면 끝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보일까요? 나의 스피커의 볼륨을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 지지를 얻거나, 자신이 믿는 사상의 전파를 노릴 수 있고, 바라는 바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명분을 얻기 위한 좋은 기회로만 여기는 거 아닐까요?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희생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겁니다.   '너 하나 죽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은거지.'

 

그래서 정말 묻고 싶은거. '당신들은 정말 슬퍼하기는 합니까?'

 

여기까지 생각에 다다르니 그들의 장단에 같이 놀아주기 싫어졌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각, 맞춰진 초점에 대해서 의문도 가집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 하다 못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슬픔이라는 느끼는 감정. 그게 정말 어디서 왔을까? 왜 어떤 죽음에는 슬퍼하면서 어떤 죽음에는 무관심할까? 왜?

 

 

One dies, million cry, Million die, no one cries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는 백만이 울지만 백만의 죽음에는 아무도 울지 않는다

 

전 슬퍼한다고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죽음을 그냥 죽음으로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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