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 :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네그나 2015. 12. 21. 23:30

단어와 사물로 문화를 분석하여 이어령은 '싸다'는 행위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 해석합니다. 한국, 중국, 일본처럼 보자기를 사용하는 문화는 '싸다'코드로, 서양인과 근대인처럼 가방을 만든 문화는 '넣다' 코드로 텍스트의 차이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양은 물건을 천으로 감싸 앉았고 서양은 공간에 넣었습니다. 양복은 입체적이고 딱딱한 형태가 되며 궁극적으로 중세의 기사들이 착용했던 갑옷과 똑같은 것이 됩니다. 서양과 달리 한국과 일본의 의복 코드는 옷을 벗으면 보자기 처럼 평면으로 변해 입체적인 형태를 남기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양복은 걸어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옷은 개겨 두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쌀 것인가? 넣을 것인가? 아이를 키우는 문화에도 싸다와 넣다는 코드가 있습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보자기처럼 포대기를 깔고 자리를 만들어서 재웠다면 서양의 어머니는 요람속에 아이를 넣어 키웠습니다. 싸는 것이 아니라 가방속에 물건을 넣듯 아이를 요람에 넣은 것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에도 등에 업기보다는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녔습니다.





부드러운 삼베로 만든 바구니형 요람이라도 해도 사자와 같은 기능을 가지는 한 안과 밖을 나누는 논리의 장벽에 갇힐 수 밖에 없고, 그 요람은  바깥의 위험으로부터 개체의 생명을 지키는 작은 성벽임에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또는 타인에게서 격리하는 지붕없는 감옥이기도 하다. 조용히 흔들리는 상자 바깥은 위험한 어둠이며 소용돌이치는 파도이다.(p.49)



포 대기에 쌓여 있는 아이의 바깥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어머니의 공간이지만, 요람의 바깥은 마녀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자작나무로 요람을 만들고 십자가와 마늘을 안에 넣었던 것은 마녀를 쫓는 힘으로 그 외부를 막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중략)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서양인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평생 사회 제도의 상징이지만 보자기와 가방코드로 읽으면 상자 속에 끝나면 구미인의 고립된 일생을 나타낸다. (p.50)


책의 일부분을 소개한 내용만 봐도 알겠지만 이어령의 특징이 잘 보입니다.  단어로 부터시작해서 물건 그리고 문화로 확장해 나가는 이어령식 해석법입니다. 그가 국문학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언어가 만들어 내는 생각의 틀이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며 세상에 반영 된다는 논리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문화를 이해하기 쉽고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서 해석하는 것 까지는 좋지만 서양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것. 그들이 현대 문명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동양은 따뜻하고 인정이 있으며 서양은 냉철하고 차갑다는 식입니다.



문화라는 것, 인문학이라는 것은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이 반영될 수 밖에 없고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어령과 다른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같은 말만 들으면 재미없잖아요. 같은 글을 보려면 책을 보면 될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인 <비밀독서단>에서 조승연의 역할이 참 좋더군요. 책을 읽고 나면 비슷비슷한 감상을 이야기하는데 독고다이로 다른 해석을 합니다. (방송 컨셉일수도 있지만). 동의 되지 않는 주장도 있지만 다른 말을 해준다는 걸 괜찮게 보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적인 게 항상 좋은 것일까?



편견이 보이는 문장이 '만약 화성인 와서 유모차를 본다면 웃음을 터트리겠지만, 일본의 어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틀림없이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다.' 이는 베이비 붐 시기에 일본에 건너온 피터 밀워드를 빌린 것이지만 그도 같은 생각이겠죠. 살과 살을 맞대어 지내는 문화가 분리하는 문화보다 더 낫다는 생각.




<시립박물관>에서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위 사진은 1957년 부산입니다. 누나가 동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고생스러움이 얼굴에 묻어 나오지 않나요? 오른쪽 아이는 어른 같은 표정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늘 동생을 업고 다니는 사람은 어머니나 여자입니다.



살과 살을 맞대는 행동에는 그들의 수고와 고생이 있습니다. 나아가 저 누나들은 동생들 뒷바라지 한다고 자신이 삶을 펼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그런 스토리는 흔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너무 과거 사례로 들었나요? 지금이야 저런 고생을 하는 사람이 없을겁니다. 의문인 것이. 왜 동양에서는 유모차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이테크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유모차가 있었다면 아이를 돌보는 수고를 덜어줄 수 있었을 겁니다. 필요성 조차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죠. 아이를 돌보는게 수고는 당연다하는 생각이었을지도.



보자기, 포대기에서 따뜻함과 낭만적인 코드만 읽는다면 고생이 볼 수 없습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는 건 인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늘 아이를 업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배부른 소림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희생으로 이어진다면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공간을 위한 투쟁



서양 문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아이들도 날 때 부터 혼자 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자는 두려움, 그 방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이 벽은 날마다 경험하는 어머니의 입맞춤으로 모자결합이 상징임과 동시에 이별과 거절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공간에서도 사는 모든 것들은 홀로 갇혀 있으며, 동시에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에 배제되어 살아간다.(P.59)



서양은 어린시절부터 엄격한 봉쇄, 배제를 경험하고 존재를 둘처럼 분할합니다. 반면 포대기의 공간은 얇고 부드러우며 유연하다고 말합니다. 부모와 함께 잠과 동시에 때때로 아버지가 쫒겨 나가기도 합니다.(P.60)



반복해서 말하겠지만 이어령은 동양은 따뜻하게 서양은 차갑게 해석합니다. 요람의 모자 분리는 '자신의 아이가 강한 독립심을 갖고 집단에 홀로 맞서 자신의 권리르 주장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책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서양의 아이들은 홀로 남겨짐에 대한 두려움을 빨리 가지게 되겠지만 독립심도 빨리 가지게 될겁니다. 자신의 공간과 권리를 온전히 확보하는 것에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점도 빨리 배울겁니다.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사고와 행동은 공간이 분리된 서양이기에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공간과는 관계 없는 말이지만 <코리안 쿨>에서 서양의 가수들이 부모님에 대해서 잘 노래하지 않는

반면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대목이 눈에 띄였습니다.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서양 가수들이라고 부모님에 대한 전혀 안 부르지는 않겠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유교문화인 한국에서 부모님 디스하는 노래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한국 가수들은 부모님에 대한 노래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생각나는 것만 해도 싸이 <아버지>, 신해철 <아버지와 나>, 인순이 <아버지> 등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아버지 단어로 검색만 해도 3091곡입니다. 곡을 보다보면 유명 가수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노래를 한 번 쯤은 불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한국가수들이 부모님에 대해서 더 자주 노래로 표현할까? 어린 시절 부터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서 일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공간을 만드는 방식 벽과 병풍



보자기에 공간을 구분하는 벽과 병풍으로 이동합니다. 작은 사물에서 큰 사물로 이동하는 패턴.


건강하고 정당한 문명사회에서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타인의 눈에 미치지 않는 은신처, 외계와 단절되 울타리, 자신만의 영역,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장소, 그것이 인간이 가진 성이다.


그러나 가엽게도 벽을 아무리 두껍게 쌓아도 필연적으로 도착하는 곳은 지하실이다. 지하실은 땅을 파서 만든 곳이기에 사라의 벽은 그 자체가 대지의 두께로 이어진다.  벽은 궁극이자 프라이버시의 궁극이다. (P.70)


우리나라 사람들은 벽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포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문화와 접촉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주거지 바로 밑에 지하실 같은 부자연 스러운 공간을 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자신의 영역이라는 공간이 없었을까?



서양인들이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벽을 두껍게 만들고 세분화했을 때, 동아시아 사람들은 벽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가볍고 얇게 만들었다. 벽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벽을 자유롭게 컨트롤 한다. 그것을 실현시킨 것이 병풍이다. 병풍에 의해 단단한 벽은 부드러운 보자기로 변환되어 인간을 감쌀 수 있게 되었다.(P.75)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현대인에게 더욱 그렇다.




병풍은 고정된 벽과 달리 융통성과 기동성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병풍으로도 프라이버시 보호가 충분히 된다는 주장인데 글쎄요. 동의되지 않습니다. 병풍은 그 유연함 때문에 프라이버시 보호가 약해 보입니다.



병풍 문화여서 개인의 사적공간에 대한 구분이 확실치 않을까? 공공도로에 차를 주차하는 장면과 곡식을 말리는데 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사적, 공적 구분이 확실치 않음을 보여줍니다. 공공기관도 사적영역에 들어오는데 익숙합니다. 아파트 관리실의 안내 방송이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독일인이 놀라워 하는게 그 예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공간에 대한 구분이 확실치 않음. 소설가 이영하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주택으로 갔습니다. 서울의 주택생활에 만족하면서 이웃의 할아버지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집으로 드나든나며 말을 했습니다. 이웃과 격의없이 지내고 있다는 말을 우스개 스럽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현재 방영중인 <응답하라 1988>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속의 그들은 경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른 집이라도 불쑥 들어갑니다. 그 시절은 그렇게 하기는 했죠. 골목문화가 가져다 주는 인간적인 모습이랄까? 아파트 문화는 분리를 조장하는 면이 있습니다.



응답하라는 이웃간에 서로 돌봐주는 정많은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에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서로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져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 곗돈을 가지고 튄다던가, 보증으로 낭패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면 현실적입니다.



글을 쓰면서 든 생각. 미국에서 삶의 이야기한 책에서 한국인들은 죽고 살기로 분쟁을 한다는 것, 미국의 변호사들은 한국인의 실익도 없는 이 같은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다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경계가 불분명함은 감정적인 공간에도 영향을 미쳐서 끊고 맺음에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지하실 같은 공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동양은 공유하는 공간이 많아서 개인공간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지하실이 부자연 스럽다고 했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인류는 초기부터 동굴같은 지하공간을 활용하고 만들어 왔습니다.



<문명과 지하공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 신화들에는 계절이 순환하듯이 인간의 삶도 지상과 지하를 순환한다는 인식이 공유되어 있다. 고대인에게 죽음이란 지하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원시 종교에서는 지상의 삶 이후에 지하의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환적 세계를 관장하는 자는 바로 여신이었다. 여신의 몸은 곡물과 과일을 생산하는 대지이며, 여신의 자궁은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고 움트게 하는 지하세계인 것이다. 이때 동굴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문’의 상징이었다. 즉 잉태된 생명이 태어나는 산도産道인 동시에 생명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관문으로서, 분리된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통로인 셈이다.


힘에 기반한 남성중심의 사회로 전환됨에 따라서 지하공간은 격하되고 멸시당했다고 말합니다. 지하는 죽음의 공간이지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특히나 현대 미디어는 지하를 고문과 살인같은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 장소로 묘사합니다.



지하와 같은 분리된 공간의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기존체제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공간의 부재때문이 아닐까? 저항을 꿈꾸려면 자신만은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지하공간은 아니지만 미국은 차고에서 창업에서 큰 부를 이루어낸 기업이 많습니다. 유명한 구글,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차고에서 창업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중요한 것 지하실이던 차고이건 자신이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 공간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기 일 수도 있고, 새로운 발명을 하기 위함일 수도, 혁명을 도모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공간은 다른 세계와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벽처럼 굳건해야지 병품처럼 약해서는 안됩니다.




현대인에게 특히 분리된 공간은 중요합니다. <비밀독서단>에서 치타델레는 단어가 나오더군요. 몽테뉴 때무에 널리 알려진 치타델레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의미합니다. 수컷을 방을 사수하라는 프로는 아버지에게도 자신만의 공간 확보가 중요하다는 걸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만 자신만의 공간이 중요하나? 애 키우는 엄마에게도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에게도 치타델레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치타델레가 가장 필요한 사람(직업)은 바로 군인입니다. 군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근본 원인은 치타델레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할 생각을 하지 못하죠. 복무신조나 달달 외우도록 했지 군인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는 걸 들어본적이 없을겁니다. 동양에서는 복종에는 익숙하지만 권리 요구에는 낯섭니다.




어쨋든 모두들 자신만의 치타델레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대신에 커피숍으로 가는게 아닐까요? 커피숍은 커피 자체를 팔기보다 그 공간과 분위기를 팝니다. 대도시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대체제를 이용하는 겁니다. 서양은  분리가 혁명과 다른 생각을 낳도록 유도를 했는데 병풍문화에서 공간을 분리하는 사고가 낯설었다고 봅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서 여기까지만 합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글은 혁명은 포크문화였기 때문에 가능했을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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