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대리사회> 제목만 듣고서는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나 사회학책임. 니가 이해하기 어려울껄 ㅋㅋㅋ'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에서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타자화 부터 시작해서 쉽지 않은 단어와 의미들이 나오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우였습니다. 물론 사회현상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지만 체험한 경험의 후기에 가깝습니다. 책 한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그런 책은 아닙니다. 에피소드 중심이라 읽기 수월합니다.
저자는 대학의 시간강사를 하다 대리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만 했던 사람이 육체 노동하는 현장으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대리운전을 하게 되면 스스로 세가지를 통제하게 된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행위의 통제. 대리운전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운전에 필수적인 동작만 허용하게 됩니다. 운전하는 차는 내가 아니므로 라디오를 켜거나 볼륨을 낮출 수도 없습니다. 대리기사는 운전석 시트를 적당하게 조절할 수도 없고 사이드 미러나 백미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말을 통제하게 됩니다. 대리기사는 손님이므로 주도적으로 말을 걸 수 없습니다. 그는 엄연히 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택시기사와 비교해보면 다릅니다. 택시기사는 손님에게 주도적으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공간의 주인이고 손님은 말그대로 손님이기 때문입니다. 택시기사는 자신의 취향과 정치적인 성향을 꺼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습니다. 대리기사는 손님이 대화를 시도하기 전까지는 운전만할 뿐이고 대화주제도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게 됩니다.
세번재는 사유의 통제입니다. 통제의 결정판으로 내가 스스로 행동하고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대리운전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면 생각하지 않는편이 일하기에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빗대어서 "나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라면 자아의 박탈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대리운전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그 차의 작은 공간이 조그마한 감옥처럼 보였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보이는 파놉티콘(Panopticon)입니다. 파놉티콘은 감시자들은 수감자를 휜히 볼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은 권력자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수감자게에는 항상 감시를 당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자동차 안에서 대리운전기사는 이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물론 손님(사실 주인)은 조수석에 앉거나 뒤에 앉기 때문에 어디에 존재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리운전기사에 주어진 의무는 운행과 전방주시이기 때문에 감시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식 미러를 통해 보겠지만 아주 잠깐일뿐입니다. 빤히 보게 되면 '뭘봐?' 소리나 듣게 될겁니다.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때문에 스스로 행동과 말, 생각을 통제합니다.
카카오의 대리운전 진출은 나쁜가?
책의 저자는 카카오 대리운전 서비스인 카카오 드라이버의 경험담입니다. 책을 읽고 놀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혁명에 대해서 논하다가 '스마트폰 하나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세상 보는 눈이 좁았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정말 일이 됩니다. 카카오드라이버로 등록을 하고 스마트폰을 쥐고 있으면 일을 따올 수 있습니다.
카카오가 대리운전 서비스에 진출하면서 골목상권 침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직접 경험한 사람을 보니 카카오가 대리기사들에게 더 낫게 보입니다. 지역의 소규모 대리업체는 노동환경이 더 가혹합니다. 수수료와 이런 저련 비용을 더하면 기사들은 30%이상을 회사에 돌려줘야 합니다. 반면 카카오는 20%의 수수료만 받습니다.
대기업이 악이고 중소기업은 무조건 선이라고 규정하면 안됩니다. 다른 버전으로 자본가는 악, 노동자는 선, 건물주는 악 세입자는 선 구도가 있습니다. 특히 진보에서 스테레오로 이런 사고를 많이 보입니다. 대기업이 조그만 파이라도 먹겠다고 달려드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기업이 진출함으로써 투명해진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감시하기가 쉽습니다.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 논란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람 목숨가지고, 역시 대기업은 탐욕스럽구나' 생각되지만 다른 중소기업은 어떨까요?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죽었음에도 어떠한 조명도 받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작아서 레이더에 포착이 되질 않습니다. 존재조차도 모릅니다.
중소기업의 부정, 편법, 꼼수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무조건적 응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더불어서 세금 가지고 지원하자는 말도 잘 안 나옵니다. 대기업이 되면 언론의 감시와 여론 때문이라도 법과 절차를 지키고자 하는 시늉이라도 합니다. 중소기업에게 법을 잘 지키나고 묻는다면요?
카카오 드라이버에서 가장 놀랐던 사실은 대금지급 방식이었습니다. 밤부터 아침까지 일한 급여가 다음날 오전 10시에 입금이 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카카오 드라이버는 손님과 기사 사이에 현금이 오가지 않고 등록된 카드로 결제가 이루어집니다. 현금이 오가지 않기 때문에 실랑이가 할 필요가 없고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까 범죄의 표적의 될 염려도 없습니다.
사실 카카오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대리기사들에게 한 달에 한번 정산해준다고 해도 뭐라도 할 사람 없습니다. 카카오가 노동의 대가를 즉각적으로 지불한다는 점은 매우 칭찬할만합니다. 이 점 때문에 카카오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아주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흔합니다.성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마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저의 아버지도 월급이 밀려봤습니다. 정엉말 짜증나고 화나는 일입니다. 월급은 한 가정은 생계가 달려있으므로 때에 맞추지 않으면 곧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스스로를 진보적인척 하는 사람들이 시스템의 동조자가 되는게 바로 이 문제입니다. 지난해 딴지일보에서는 열정페이 논란이 일어났었고, 놀랍게도 그들의 대응은 사회 부조리를 보였던 기득권 집단과 별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2014년에 허핑턴포스트가 진중권에게 공짜로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었다고 합니다. 진중권 정도 되는 사람에게 공짜로 글을 써달라고 해달라고 했으니 급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을지는 뻔해보입니다. '여기에 실어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거 아니야' 였을 겁니다. 착취를 비판하면서 착취에 무감각한 내로남불 사고입니다.
IT 기술이 만들어내는 칼날은 어디로 향하는가?
기술은 발전은 사회에 많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스마트폰과 무선인터넷은 기존의 구도를 해체시켰습니다. 카카오가 등장함으로써 어떤 사람에게 생계를 이끌어나갈 기회를 주고,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에게는 위협이 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겁니다. 똑같은 과정이 반복됩니다.
4차산업혁명, 인공지능이 수시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사회에 큰 파급효과를 보인 힘은 무인자동차와 자율운전입니다. 지금도 기술 수준이 상당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의 운전능력은 평균이상이라고 생각한다지만 자율운행차와 대결해보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지 의문입니다.
자율운행차가 세상에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운전기사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주점에서 기분좋게 술을 마시고 나서도 대리운전을 부르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될 겁니다. 차가 스스로 집으로 가주니까요. 그렇게 되면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큰 타격이 됩니다. 버스안내양이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던 것처럼, 운전기사라는 직업도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아니 지금의 기술발전과 방향으로 보면 유력합니다. 사회적인 합의가 없다면 머지 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자가 많은 배운 식자층이지만 대리운전은 배움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아무것도 가진것 없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수단이자 ,사회복지 역할도 겸합니다. 이게 미래에 사라질 위기인겁니다.
저자는 맥도날드에서도 일한 경험도 있습니다. 묘하게도 이 책을 읽었던 공간은 맥도날드였습니다. 아메리카노 하나 시켜놓고 책을 펼쳤습니다. 생각보다 재미 있어서 계속 읽게 되었는데, 이 공간도 키오스크의 등장으로 과거보다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발전하면 사람은 더더욱 설자리를 잃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겨진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기술은 양날의 검처럼 항상 양면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날끝이 내쪽에 더 길어 보일 때가 문제입니다.
그들은 매트릭스에서 활동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대리사회>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는 아주 감명깊게 보았던 <매트릭스>였습니다. 대리기사들의 활동과 모습이 겹쳐서 보였습니다. 매트릭스는 기계의 지배에 저항하는 인간의 내용이고, 대리운전은 돈 벌러 나가는 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라는 것은 같습니다. 생계가 해결안되면 죽는 건 마찬가지이니.
매트릭스에 접속하게 되면 기계가 지배하는 감옥으로 들어가는 셈이고, 타인의 공간인 진입하는 대리기사들도 생각과 행동을 통제받게 됩니다.
한 건의 대리운전을 끝날 때 마다 그들은 자아를 되찾는 듯 보입니다. 가상세계에 빠져 나와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는 네오와 비슷해 보입니다. 매트릭스에서 현실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오퍼레이터가 거는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방해하는 요원들의 피해 달아나야 했지만, 현실에서 제한은 막차 시간과 집으로 되돌아갈 콜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콜을 받아야 현실로 되돌아간다.
매트릭스에서는 전화와 총이 무기이고, 대리기사 세계에서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신체의 일부라고 표현해도 좋을 폰과 그 생명유지장치라고 할 수 있는 보조배터리입니다. 배터리가 없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행동과 같습니다.
매트릭스 세계에서 해킹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인간들만 매트릭스를 해킹하는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해킹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묵인하에 존재하기도 하고 단속을 피해서 숨어지내는 존재도있습니다. 대리기사 세계에서 협력자는 같은 대리기사들이고 (함께 다른세계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도모) 의외의 도움을 주는 사람은 택시기사입니다.
대리기사 세계에서는 택틀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택틀은 택시셔틀의 준말입니다. 택시기사는 영업가능한 지역이 정해져 있습니다. 서울은 서울에서, 경기도는 경기도에서만 가능합니다. 서울에서 손님을 태워 경기도로 가게 되어 돌아 올 때, 원칙적으로 손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만 대리기사들을 태워가는 건 그들도 묵인해 준다고 합니다. 택틀은 안되는 일이지만 대리기사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해킹처럼 보입니다.
대리기사도 하나의 거대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외국인은 한국에서 존재하는 요정이 대리기사라고 말했습니다. 술을 얼마나 마셨든지 마법처럼 이동해 안방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 그럼직도 합니다.
제 눈에는요. RPG게임에서 모험하는 용사처럼 보입니다. ( 어쩔 수 없는 겜돌이라....) 고요하고 적막한 밤거리를 스마트폰이란 횃불을 들고 퀘스트를 하나 하나 수행하고 보상을 얻는 용사들. 그렇게 보입니다. 오늘밤에도 퀘스트를 무사히 수행하고 현실로 안전하게 빠져나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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