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유행하는 단어 중 하나가 하류(下流)입니다. 일본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에rp서 배움으로부터 도피, 노동으로 부터 도피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책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이런 경향을 하류지향(下流志向)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거부하고 달아나고 있습니다. 교육은 신분 상승의 기회임에도 이를 거부합니다. 스스로 하류 사회로 진입해 계층이 내려가는 선택을 합니다. 그들은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을 두고 내려가는 선택을 할까?
'이걸 배우 뭐가 좋아요?' 질문을 받는다면
80~90년대만(일본의 경우)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소소한 집안일을 거들면서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받고 노동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키웠습니다. 그 이후 세대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서 먼저 소비자로 과정을 거치는 편입니다. 돈을 지불하면 그 즉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고 여기에는 나이에 따른 제약은 없습니다. 돈을 가진 구매자로 세상을 접한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구매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배움을 물건 구입하듯이 흥정합니다.아이들은 배움의 장에 서게 되면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 "이건 어디에 필요한 거예요?"
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면 교사와 부모들은 실용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 존경받는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 좋은 직업,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수준 높은 배우자를 얻을 수 있다.' 등입니다. 마치 잘 팔리지 않는 물건을 어떻게든 소비자 마음에 들게 해서 팔아 치우려는 상인처럼 행동합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돈을 내고 물건을 사는 것을 교육의 전부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배움을 권리로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이 열리고 6세 이상의 아이들이 산업현장에서 10시간 이상식 일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선호했는데 어른보다 다루기기 쉬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커피 수확이나 탄광 노동에 아이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의무교육이 생겨난 이유도 과도한 노동에게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필자는 배움을 갑자기 게임에 참가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식입니다. 우리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생각을 해보면 그렇습니다. '학교갈 나이가 되었으니 우리말을 배워볼까?' '우리말 구사능력이 높으면 취업에 유리할꺼야" 실용적인 계산을 하고 배우지는 않습니다.
하다 보면 말하게 되고 읽고 쓰게 되고 더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배움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 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의 동기가 됩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자 우리말을 배우겠어요' 하고서 아이들에게 배우려는 동기가 있는지 자문한 다음, 배움에 대한 동기가 없다면.( 즉 쓸모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 아이에게는 우리말 공부를 면제해 준다면 한다면 학교는 어떻게 될까?
똑똑한 질문과 멍청한 대답
필자가 학교 신문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현대 사상은 왜 배워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설득력 있는 답을 한다면 배워도 좋겠지만 설득력 없으면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배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다는 사고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가치관이 바르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옳다는 보장은 누가 할 수 있을까?
'이걸 배우면 어디에 도움이 되냐고 묻는 것은 냉정하고 비지니스적인 질문입니다. 만족할만한 답을 찿지 못하면
의기양양하게 내다버립니다. 그런데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논리적이고 모두가 만족할만한 답은 할 수 없습니다. 질문은 똑똑하게 보이는 반면 답은 멍청하게 보입니다.
필자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도피를 글로벌 자본주의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투자와 효용을 생각하고 손해를 본다고 생각되면 하지 않습니다. 주식회사의 평균 수명은 일본이 7년, 미국은 5년입니다. 배우지 않는 아이들은 글로벌 자본주의 감각을 깊게 내면화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기업처럼 자신의 수명을 5년 정도로 설정하고 이에 근거해 가치 판단을 합니다. 논리적으로 옳지만 그들의 수명은 5년이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를 내팽게친체 무책임한 결정을 합니다.
필자는 글로벌 자본주의적 사고로 보는데 이렇게 봅니다.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이분법적 사고는 효율 극대화 시대의 산물입니다.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다가 얻어맞은게 2008년 금융위기와 후쿠시마 원전사고 입니다. 효용을 극대화에 방해되는 것은 불필요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필요함, 쓸모 있음만 추구하다 크게 얻어 맞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다”. 고 말했고 아이폰이 일으킨 스마트폰 혁명은 인문학 바람을 불었습니다. 경영에 인문학을 접목시킨다고 하고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문학을 배우면 돈이 된다. 그러니 인문학을 배우자.'이 역시 자본주의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배워도 돈이 안됩니다. 인문학을 배워도 아이폰 안 나옵니다. 인문학은 마법같은 효과가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효율이 떨어지는 인문학을 배워야 할까?
스티브 잡스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안철수가 방송에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효율을 놓고 보면 자신은 비효율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고.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앞날이 보장된 의사를 하다가 때려치우고 백신을 만들었으니까요. 안철수가 백신이 아주 큰 수익을 거둘것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죠.) 이게 어디에 사용될지 유용성을 잘 모르다가 좋은 의미로 크게 얻어맞은 겁니다.
인문학 열풍은 효율, 쓸모있음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반작용일겁니다. 인문학 배우고 싶으면 그냥 배우면 됩니다. 한국에서는 그냥 이라는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뭘 하면 논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되니까 돈 안되는 쓸모없는 짓을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쓸모 없는 행동을 한 사람을 중에서 후에 놀랄만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혁신은 효율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비효율적을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나 아웃사이더들에게서 나옵니다. 효율을 외치는 시대에 사회가 발전하려면 비효율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역설적입니다.
리스크 사회의 동기부여의 양극화
우리나라도 비슷하지만 전후 일본은 노력하면 사회적인 자원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파이프 라인 사회였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서 다른 파이프 라인을 타게 됩니다. 그런데 이 파이프 라인이 좁아지고 균열과 누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노력에 대한 확실성이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같은 학교 같은 과정을 밟더라도 누구는 교수가 되는 반면 누구는 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의 불확실성이 증가하여 개인의 장래 생황을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 사회가 등장했습니다. 리스크 사회에서는 노력에 대한 성과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파이프 사회에서 균열이 일어나자 계속 노력을 기울이는 학생과 노력을 포기하는 학생들에서 학력격차가 일어납니다.
보통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학력이 더 높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뢰의 차이기도 합니다.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은 노력하면 더 많은 성취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는 반면 빈곤층 자녀들은 믿지 않습니다. 양 계층간에는 학력이 차이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가 있습니다.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 동기부여의 차이가 있습니다. 노력에 대한 차이는 측정할 수 있지만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는 측정할 수 없습니다.이제는 동기부여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리스크 사회에서 생존 경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노력에 반드시 보상이 따르지 않는 리스크 사회라는 사실을 거스르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가 리스크 사회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리스크를 떠 앉고 이상하게도 리크스 사회가 아니라는 행동하는 사람들이 리스크를 방지합니다.
사토리 세대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류지향은 일본의 사회 현상을 말하고 있지만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절판되었다가 5년이 지난 뒤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절판된 책이 다시 출판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출판사는 책일 팔릴거라고 예상한다는 것이고 원하는 수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도 일본이 경험하고 있는 배움과 노동으로부터 아이들이 달아나는 현상’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일겁니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문화적인 격차가 15년 정도 난다고 합니다. 요즘은 격차가 좁아져 10년 정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이 10년뒤 한국에서 일어날 것이고 10년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겁니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을 일본을 비슷하게 따라갔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산업구조도 비슷하고 똑같지는 않지만 문화도 사고도 비슷합니다.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사토리는 (さとり) 사토리는 득도를 뜻하는데, 이들 차나 명품소비, 해외여행에 관심이 없고 출세하겠다는 의지도 없습니다.
차 를 타지 않고, 브랜드 옷도 입으려 하지 않고, 스포츠도 안 한다. 술도 안 마시고, 여행도 안 간다. 연애는 담백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일에는 나서려 하지 않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초식계(연애나 섹스에 관심 없는 경향)에 낭비를
하지 않고 욕망하는 게 없는게 특징입니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에 성장한 세대란 점이 주목할만합니다.
사토리 세대는 환경에 최적화된 결과입니다. 이들은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리스크 사회에서 적응했습니다.노력해도 안되니까 포기합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꿈꾸지도 않습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들이 적응한 결과는 반 자본주의적입니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옷'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욕망과 소비로 굴러갑니다. 사토리세대는 스스로 욕망을 거세시켰습니다. 욕망이 없으니 성취를 위한 불필요한 노력할 이유도 없고 현재에 만족합니다. 무기력한 사회에 적응한 이들이 무소비, 무소유로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다를까요? 삼포세대라는 말이 등장했고 학력에 대한 신뢰도 사라졌습니다. 파이프가 균열과 누수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개천용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자조를 들을 수 있고 희망의 불빛이 희미해집니다. 일본에서 봤던 그 현상입니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참견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일본의 특유 '다른 사람들에게 폐치지지 않기'를 염두해둔 말일겁니다. 한국은 한국 사람 특유의 참견이 있으니까 일본보다는 나을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일 겁니다.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믿으면 결국 희망을 저버릴 수 밖에 없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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